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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합 제74호(가을) 신앙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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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1-08-26 10:30 조회1,0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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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마태 6,13)

 

 

1.이해하기 어려운 청원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마태 6,13)의 청원은 나머지 다른 청원들보다 이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얼핏 보기에 이 청원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유혹에 빠뜨리신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바로 이런 점을 야고보서는 단호하게 말한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야고 1,13)

프란치스코 교황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인간 삶의 여정을 위협하는 유혹의 주체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시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생선을 달라는 자녀에게 뱀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루카 11,11 참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삶에 악이 나타날 때 우리가 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인간 편에서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느님이십니다.”(2019.5.15. 수요 일반 알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유혹하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것은 사실 우리 인간이 본래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원죄의 상처로 인해 악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그 아픔이 끊임없이 나지막하게 울부짖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울부짖음이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청원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청원은 우리 인간 존재에 꼭 필요한 기도이다.

 

2.우리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는 시련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의 청원에서 ‘유혹’의 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어렵다. 이제 이 단어를 좀 더 살펴보자.

이 ‘페이라스모스peirasmós’는 ‘유혹’만이 아니라 ‘시험’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야고보서는 이 단어를 첫 번째 의미 곧 ‘유혹’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겪는 중대한 유혹을 ‘시험’ 혹은 ‘시련’의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를 우리는 야고보서의 다른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πειρασμοῖς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2-3) 여기에서 사용된 어휘 ‘페이라스모스peirasmós’는 유혹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순수하고 참되고 성실한지를 알기 위해 사람을 시험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할 자기 외아들 이사악을 과연 희생 제물로 받칠 수 있는지를 시험받는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epeírase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창세 22,1-3)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분부에 따라 떠나는 길은 결코 한가한 산책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를 포함하여 현재와 미래 곧 자신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길이며, 그러기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철저히 믿고서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결정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분부대로 제물을 바쳤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믿음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믿음이란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 하느님께 철저히 기초하는 행위이다. 세상에는 하느님만큼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아브라함은 확신한다. 아브라함은 곧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니까 이런 시험을 통해서 경건한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지가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시험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 인간을 몰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시험이 항상 주어진다는 점이다. 시험이 없으면 강인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시련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거대한 기계 제작에 사용되는 철이 그 기계에 요구되는 내구력을 과연 지니고 있는지 먼저 그 강도와 하중이 점검되는 이치와 같다. 사람도 하느님께서 봉사자로 부르시고 선택하시기 이전에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청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저희가 시험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을 거스르는 불충한 사람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마소서.’

 

이상을 종합하면,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의 청원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우리를 악으로 유인하는 유혹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피하기 어렵다. 이 유혹은 인간의 현존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함부르크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우리는 모든 측면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인생의 크거나 작은 일들에서도 유혹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동에 의해, 환상에 의해 유혹을 받습니다. … 유혹의 세력들은 어디에나 자리하고 있습니다. 곧 외부에서 그리고 우리 마음 내면에서, 환상이 떠오르는 머리 위에서, 사나운 늑대처럼 날뛰는 우리 욕망이 어두운 지하실 등에서 도사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이런 청원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둘째,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당신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말해야 한다. 가혹한 시련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과정에 필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련은 인간을 더욱 품위 있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시련을 통해서 인간은 하느님의 온전한 협력자가 될 수 있다.

셋째, 우리가 이런 청원으로 하느님께 나간다는 사실은 우리의 무능력 곧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유혹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근본진리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도움을 통해서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언급하는 유혹을 이렇게 시험 혹은 시련의 의미로 이해하면, 문제가 본질적으로 더 단순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peirasmós이 하느님의 허락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3.우리를 악으로 유인하는 유혹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점은, 성경에서 ‘페이라스모스peirasmós’가 죄악으로 유인하는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유혹도 자주 지칭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사탄 곧 유혹자ho peirázon가 활동한다. 그리고 ‘페이라스모스peirasmós’의 단어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탄의 활동은 본래 인간을 죄악으로 유인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은 인간이 유혹에 굴복하는 상황들을 자주 언급한다.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그것이다. 유혹자는 첫 조상의 경솔함과 불신을 이용한다. 먼저 가벼운 질문으로 첫 조상에게 인간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6) 이렇게 유혹자는 첫 조상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함으로써 첫 조상을 굴복시킨다. 우리는 다윗 임금의 죄악도 상기할 수 있다(2사무 11,2-5). 아니면 대사제 관저에서 베드로의 배반을 생각할 수 있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4)

이러한 몇 가지 실례는 인간이 악의 세력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잃고 하느님을 배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청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저희는 유혹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혹이 악의 모습으로 저희에게 다가오면, 저희를 유혹에 넘기지 마시고, 유혹의 세력에도 내치지 마소서. 유혹의 순간에 저희 곁에 함께 하소서.’ 곧 그 청원으로 우리는 유혹자의 공격과 권능에 무방비하게 넘겨지지 않기를 청한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은 유혹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유혹을 견뎌내고 극복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4.유혹 중에 우리가 취할 태도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47세에 스물한 살 된 조카 소피아 알렉산드로바나 이바노바(1847-1907)에게 편지를 썼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이 유혹에 넘어갔던 이야기와 이로 인해 입었던 상처에 대해 언급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판에 박힌 내용이 아니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미 내가 겪은 고통이라네.” 편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그대는 지금까지 걸어온 올곧은 길을 계속 걷기 바라네. 적당히 타협하여 그대의 길을 양보하지 말게. 그대의 올바른 생각을 반드시 지키게. 그대가 한 번이라도 그대의 명예와 양심과 타협한다면, 오랫동안 그대의 영혼은 나약하게 될 것이네. 그래서 앞으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쉬운 쪽만 택하고 어려운 일은 피하는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네.”

도스토예프스키가 여기에서 호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단호함과 비타협이다. 이는 인간의 삶에 단단한 기초를 놓아주어, 하느님과 복음과 예수님의 길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힘을 준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생각해보자.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우리의 삶에는 항상 분명하게 ‘예.’ 혹은 ‘아니오.’ 하고 대답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예.’ 혹은 ‘아니오.’를 항상 다시 단호하게 언급하는 사람은 올곧은 삶의 길을 걷고, 자기 자신과 하나 됨을 체험한다. ‘예.’도 ‘아니오.’도 단호하게 결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기만하게 되고, 그런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도 하나 되지 못한다. 그는 불행을 선택한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는 올바른 생각을 지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생활의 대가들은 항상 ‘감정의 조절’을 이야기한다. 이런 감정의 조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나쁜 감정이나 나쁜 생각을 선하고 유용한 감정이나 생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여기에는 다음 원칙이 중요하다. 곧 우리가 나쁜 어떤 것을 특히 그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림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그릇된 가치를, 이와 대립되는 자명한 진리를 깊이 주목함으로써 대체하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 조절에 꾸준히 노력할 경우, 완전히 새로운 가치에 대한 안목이 성장한다. 우리는 곧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끼고, 그분은 우리 마음의 파트너가 되신다. 하느님과의 이런 새로운 관계는 또한 우리의 내면을 굳건하게 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자신감, 새로운 자기신뢰, 새로운 평온, 새로운 확신 등을 준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사라지고, 내적인 갈등은 해결된다. 감정 조절이 의미하는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곧 자기 자신 안에서 미심쩍은 것이 움직이면 즉시 경종을 울리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다인에게는 유혹조차도 하느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다. 때문에 요셉은 자기 삶을 회고하면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 50,20) 우리도 큰 시련이나 유혹을 겪을 때 그것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신앙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