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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국[보도자료] 전주교구 약사(아래 글 역사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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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국 운영자 작성일09-02-10 00:00 조회4,8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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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전주 교구 약사

 

전주지방의 천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1784년 가을 전주의 토호이며 양반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의 권일신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향하여 호남 지방의 사도가 되었다. 1784년 겨울에는 진산의 양반인 윤지충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입교하고, 1786년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이 지방의 천주교는 전주와 진산을 중심으로 뿌리내려 갔다.

 1791년 (신해박해)에는 진산에 살던 윤지충과 그의 이종 사촌인 권상연이 유교식 조상 제례를 폐지하고 천주교 의식을 따랐다 하여 전주에서 처형됨으로서 두 사람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전주는 한국 성지의 일번지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에는 전주에서 200여명이 체포되었는데 (전국에서 500여명),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 가족이 순교 하였으며, 동정 부부 순교자로 널리 알려진 유항검의 큰 아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누갈다가 순교한 것도 이때였다.

전라북도에는 1791년 박해 이후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1801년 박해 후 정국이 평온해 지자 전국의 신자들은 전라도를 피난처로 삼아 모여들었다. 특히 1866년(병인박해)를 전후하여 전국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로 성황을 이루어 이들이 이룩한 교우촌은 전라도의 심산궁곡(深山窮谷)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다.

그 결과 1827(정해박해), 1839년(기해박해), 1866년(병인박해)등 박해 때마다 희생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박해 때마다 출중한 신앙의 표양을 남긴 순교자들이 많았는데, 병인박해 때 순교한 분들 중 7명이 1984년에 시성되었다.

이 지방에는 박해를 경험한 신자들이나 순교자 가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전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지속해 왔다. 그래서 전주 지방은 선교사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곳이었다.

개항기에 이르러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나 토착민들과의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동학 농민 전쟁 때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선교사와 신자들의 열성과 노력으로 대한제국 말기까지 6개 본당을 세울 수 있었으며, 애국 계몽 운동기에는 이들 본당을 중심으로 교육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1년 4월 8일 교황청은 조선교구를 경성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를 대구교구에 예속시켰고, 드망즈 주교를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대구교구에 속하는 신자수는 26,741명이었는데, 그 중 전라북도의 신자수는 13,506명이었고 본당 수는 7개였다.

1931년 5월 10일 드망즈 주교는 전북감목대리구를 설정하고 감목대리에 김양홍 신부를 임명하여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도록 했다. 당시의 대구교구 소속 한국인 신부는 29명인데 전라도 지역에는 15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활동하고 있어서 이들에게 사목 책임을 맡겨도 가능하리라고 판단하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을 철수시켰다. 당시의 현황은 신자 17,529명, 한국인 신부 15명, 본당 14개 (전북 10개, 전남 2개, 제주2개), 공소 199개, 성당 36개(경당 포함)였다. 이렇게 감목대리구가 되었으나 신자들이 가난하여 교회는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래서 전라남도는 인구가 많았지만 외교인 선교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드망즈 주교의 판단으로 이런 상태로는 장차 자치 교구가 되면 재정적인 어려움이 더욱 클 뿐 아니라, 전라남도의 전교사업이 부진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당면 과제의 해결책으로 전라남도를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하고 1943년 5월 10일 전남감목대리구를 설정하였다. 그후 1937년 4월 13일 6년 동안의 수련 기간을 거친 전북감목대리구를 대구교구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지목구로 승격시켜, 한국 교회 사상 첫 번째 한국인 자치 교구로 설정하고 교구장에 김양홍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남감목대리구도 지목구로 승격시키고 교구장에 맥폴린신부를 임명하였다. 당시 전주교구의 현황은 신자 19,300명, 한국인 신부 15명, 본당 14개, 공소 177개, 성당 44개(경당 포함), 신학생 5명, 상주 회장 201명, 전교 회장 35명이었다. 김양홍 교구장은 1938년 유지재단을 설립하여 교구의 재정적 기초를 닦아갔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과 정부의 탄압에 시달린 나머지 1941년 11월 21일 노령을 이유로 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1941년 12월 2일 제 2대 교구장으로 주재용 신부가 임명되었다. 해방이 되자 전주교구는 교구장과 신자들이 일치하여 한글 보급과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1946년 1월 19일 주재용 신부는 대구교구장으로 이임되고, 1947년 7월 7일 제 3대 교구장으로 김현배 신부가 임명되었다.

김현배 교구장이 취임한 후, 교구는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전개하였다. 한국전쟁때는 김 교구장과 5명의 신부가 교도소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였는데, 각처에서 70여명의 교우가 희생되었다. 김교구장은 1군 1본당 원칙을 내세워 본당 설립에 주력하여 실현 하였는데, 재임 기간 동안 16개 본당을 신축하였다. 1957년 3월 7일 전주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김현배 신부가 주교로 임명되었다. 1960년 4월 30일 김 주교가 사망할 때의 교구 현황은 본당 24개 , 공소 213개, 신자 38,765명이었다.

1961년 2월 13일 한공렬 주교가 제 4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한 주교는 평신도 사도직을 강화하여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도회를 조직하였다. 한편으로 가톨릭 센터를 세워 지역 사회에 문화 사업을 펼쳐나갔다. 또한 인보성체수도회를 유치시켜 교구 발전에 일익을 주었다. 1962년 3월 10일에는 한국 교계 제도가 설정되어 6월 10일 명동성당에서 교황 선포식이 거행되었고, 서울, 대구, 광주교구는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전주교구는 교계 제도상의 정식 교구인 주교구가 되었다.

1971년 7월 14일 한공렬 주교는 대주교로 승품되어 광주대교구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리고 1973년 2월 10일 제 5대 교구장에 김재덕 주교가 임명되었다. 김재덕 주교는 성소육성과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사제들의 유학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해성학원과 성심 학원에 종교감을 파견하고 대학생회관을 세우는 등 청소년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을 강조하여 사회 정의 구현에 앞장섰으며 전교구민이 일치를 이루어 불의와 맞서 싸웠다. 교구 사제들이 연행 또는 피습되고 투옥되는 탄압 속에서도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에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또한 평신도들의 역할과 사명을 각성시키고 사도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여 평신도들의 위상을 높였다. 김재덕 주교는 건강상의 이유로 1981년 4월 10일 교구장 취임 8년 만에 사임하였다.

1983년 6월 24일 제 6대 교구장 박정일 주교가 임명되었다. 박정일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앞두고 교구 역사를 정리하며 순교자 유해 발굴 작업을 착수하여 실전되었던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유해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여 본당 확장에 힘을 기울여 재직 기간 중에 17개 본당을 신설했다. 그리고 성지 개발과 피정의 집 건립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남미 페루에 3명의 선교 사제를 파견하여 그곳 교회의 사목을 돕도록 했다.

1988년 12월 28일 박정일 주교는 마산 교구장으로 전보되고 1990년 2월 20일 이병호 주교가 제 7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 주교는 치명자산 성역화 작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가족묘 시굴 작업과 기념성당 봉헌식,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 하였다. 또한 전산화를 통한 교구 행정 정비와 교회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성서 통독 운동과 선교 본당 제도를 신설하여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로서 2007년 4월 기준 83개 본당 17만 여명의 신자, 183명의 신부 병의원 1개소 사회복지기관 23개소 교육기관 17개소에 이르렀다. 또한 그동안 숙원사업이었던 교구청 신축에 필요한 부지 (새 전주 교구청)를 2003년 7월 15일 자로 매입하여 2005년 9월 1일 기공식을 시작으로 새로운 교구청 신축에 온 교구민이 함께 힘을 기울여 노력한바 오늘 2007년 4월 13일 축복식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