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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1996년도 사목교서 - 2000년 대희년을 바라보며

본문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갈라 4, 4).

1.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때를 기준으로 셈하기 시작한 역사가 4년 후면 2000년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묵시록 21, 6)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후 세 번째로 맞이하게 된 천년기(千年紀)를 앞두고, 우리 신앙인들은 맞갖은 준비를 통해서 이 역사적인 기회를 의미있게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이를 위해 특별교서를 반포하셨습니다. <제삼천년기(第三千年紀)>라는 제목으로 1994년 11월 10일에 발표된 이 교서에는 2000년에 지내게 될 대희년(大禧年)의 의미와 이를 앞두고 교회가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갈 준비 과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구는 그 기본 노선에 따라 대희년 맞이 준비를 해 나갈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1996년은 모든 신자들이 대희년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1997년 부터 3년 동안은 예수그리스도, 성령, 아버지의 순으로 성삼 각 위격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기가 될 것입니다.


런데 희년의 의미는 특히 구약성서 레위기 25장과 예수께서 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루가 복음 제4장에 소개된 내용 속에 가장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밝히시는 장면에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



2. 기서 “은총의 해”라는 표현은 사실상 희년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레위기 25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네 민족과 살고 있는 땅이 본래 하느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따라서 그 땅과 사람들을 함부로 하거나 영영 팔아 넘길 수 없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조치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여러 단위의 시간 중에서 일부를 특별히 떼어내어 하느님께 바치고, 물질적 삶에 치우쳐 사는 동안에 엇나가고 뒤틀렸던 관계를 하느님 앞에서 반성하고 이를 원래의 모습대로 돌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7일 가운데 하루는 안식일(安息日), 7년 가운데 한 해는 안식년(安息年), 그런 안식년이 7번 지나가고 난 50년째에는 희년(禧年)을 지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6일 동안 일을 하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안식일을 맞아 온갖 일에서 손을 떼고 쉬면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분을 공경하기 위해서만 그 하루를 보냈듯이, 6년 동안 일을 한 다음 7년째에는 땅도 놀리고 남의 종살이로 매어 있던 사람들도 풀어주는 안식년을 지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안식년에는 사람들이 지난 6년 동안에 진 빚들을 완전히 탕감해 주는 관습도 있었습니다. 그런 안식년이 다시 7년 지나는 49년의 세월이 가고 50년째가 되는 해에는 일종의 대안식년(大安息年)이라고 할 수 있는 희년이 선포되어 안식년의 의미와 관습을 한층 더 깊고 넓게 찾아 실천하였습니다. “오십년 되는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레위 25, 10)


난 세월 동안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난하게 되어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남의 종으로 팔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람들이 이 희년에는 그 모든 권리를 되찾아 자신의 땅을 회복하고 종의 신분을 벗어나 다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에든 매어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던 것 입니다. 그런데 모세법의 이 이상이 실제에 있어서는 글자 그대로 실현되는 일이 많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은 먼 훗날 때가 되어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루어질 꿈으로 사람들의 정신 속에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3. 러던 중에 예수께서 오셔서 바로 그 때가 마침내 다가 왔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온갖 질병에 매어있는 이들, 사회적 편견과 멸시의 사슬에 묶여 있는 이들, 경제적 불의의 희생이 된 이들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죄악의 오랏줄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풀어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이들에게 더 없이 큰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쁨을 주시는 그분의 솜씨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고장나고 손상되었던 생명들이 그분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모두 되살아났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껑충 껑충 뛰었으며, 죽었던 사람이 소생했습니다. 세리가 사도로 변하고 창녀가 성녀로 바뀌었습니다. 폭도가 양민으로 바뀌고 강도가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침략국의 앞잡이로서 동료를 착취함으로써 반민족적 부정 부패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던 인물이 한꺼번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지난날의 잘못을 네 배로 기워 갚는 선량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틀어지고 엇나갔던 것들이 그분의 손길에 닿자마자 모두 제 모습을 되찾았던 것 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병균이 침범하여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겪다가, 마지막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용한 의사의 치료를 받고 씻은 듯이 건강을 회복한 사람의 날아갈 듯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희년의 의미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기쁨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들에게는 말하자면 하늘이 변하고 땅이 새로와 졌습니다. 시간과 역사도 마찬가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까지를 구약시대, 그 이후를 신약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일반 역사에서도 이 구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지금은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과 후로 나누어 셈하는 방식을 많은 나라들이 받아들이기에 이르렀습니다.


4. 그런 일이 지금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렇게 해서 5.18 문제처럼, 빗나간 역사가 철저한 규명과정을 거쳐 바로잡혀지고, 노태우 씨의 비자금 사건처럼, 다리가 끊어지고 대형 건물이 내려앉는 등의 참사 뒤에 도사리고 있던 비리의 구조가 철저히 밝혀져서 이 모든 사건들이 오히려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중병을 깨끗이 치유하고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계기로 바꾸어질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참으로 절망과 좌절 대신에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이 움켜쥐었던 것을 풀어 남과 나누고, 마음속에 쌓였던 담벼락을 헐며 깊이 파였던 골을 메워 참으로 하나를 이룰 수가 있을까?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은 이 외에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기성세대의 윤리적 타락, 이를 보고 자라는 청소년들의 방황, 환경오염, 민족분열 등의 문제는 그 몇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런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이스라엘이 처했던 상황도 별로 더 나을게 없었습니다. 그 때에도 로마의 침략을 받고 있다고 하는 현실적이고 민족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종교적 혼란상에 이르기까지 각종 어려움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특유의 눈으로 모든 문제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를 꿰뚫어 보시며, 사람들이 참된 자유와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참으로 깊이 만난 사람은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과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그분을 참으로 깊이 만나는 일입니다.


5. 러므로 우리는 금년 한 해 동안 먼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제삼천년기”를 중심으로, 희년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각자와 공동체, 나아가 우리 사회를 묶고 있는 것, 우리 눈을 가리워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의 의견이 충분히 수렴되고 교환될 수 있도록 교구 사목평의회를 개최해야 하겠습니다. 이에는 교구의 모든 신자들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하고 운영함으로써, 교구사목평의회 과정 자체가 교구민 모두를 위해서 주님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사명을 깊이 알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 귀중한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와 함께 우리 교구민 모두의 자랑인 순교자들의 삶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한 노력도 새롭게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본 듯 확신을 가지고”(히브리 11,27) 살아가신 선현들, 그리고 지금 우리 사이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신앙인들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고 만질 수 있는 모양으로 내려 주시는 은총 가운데 하나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런 분들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 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자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리 12, 1-2).



 

1995년 12월 대림 첫주일에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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