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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도 사목교서 -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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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성령의 힘으로 실천합시다
- 대희년 특별 사목 교서 -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세계 모든 그리스도 신앙인들과 함께 열심히 준비하며 기다려 온 대희년에 드디어 우리가 들어섰습니다. 인류가 천년 만에야 한번씩 경험하는 이 귀한 기회를 우리가 살아서 맞이할 수 있도록 안배해 주신 하느님께 먼저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30여년 전부터 이 대희년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만큼 이 대희년은 2000년 한 해 동안만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교회가 이를 준비해 온 기간에 해당하는 한 세대 동안,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신앙생활을 비추는 빛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지금까지 교회가 이 대희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해 왔는지를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이제부터 한 결 더한 열정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대희년의 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제 1 부
교회는 대희년을 어떻게 준비해 왔는가?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희년 준비 과정에서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입니다. 이에 관해 대희년 준비를 위한 특별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천년기를 위한 최상의 준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각 개인과 온 교회의 삶에 되도록 충실하게 적용하려는 새로운 투신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입니다. 넓은 의미로 보아, 2000년의 대희년을 위한 직접적 준비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실제로 시작되었습니다”(제삼천년기 20항).


계 모든 지역의 대표 주교들 2000여명이 모여 약 4년 동안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최종적으로 채택한 16개 문헌 속에 그 열매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16개 문헌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4개의 헌장입니다. 다른 문헌들은 이 헌장들 속에 이미 밝혀진 원칙과 방향을 여러 분야에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선 교회를 구성하는 여러 신분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어떤 위치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이 헌장이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평신도는 누구인가?
“평신도들의 특별한 사명은 평신도를 통해서만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 그 장소와 환경 속에서 교회를 현존케 하고 활동케 하는 그것이다”(위 헌장 33항). 가정, 들판, 병원, 시장, 사무실, 관공서 등 평신도들만이 쉽게 접근하고 또 생활의 터전으로 하여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들의 고유한 활동무대이며 복음선포의 현장입니다. 거기서 평신도들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주변 사람들이 그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마태 5,16) 할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누구인가?
도자들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표명하는 “복음적 권고의 서원은 그리스도교적 성소의 의무를 충실히 완수하도록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이끌 수 있고 또 이끌어야 할 한 가지 교훈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지상에 영원한 나라를 가지지 못하고 미래의 나라를 찾고 있을진대, 수도 신분은 수도자들을 현세 걱정에서 더 잘 해방시켜 주는 그만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는 천상 보화를 더 잘 보여 주고,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얻게 된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더 잘 증거하며,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다”(위 헌장 44항).

성직자는 누구인가?
“주교들은 그 조력자인 사제와 부제들과 함께 하느님을 대리하여 양 무리를 맡아, 그 목자로서 교리의 스승, 거룩한 제사의 사제, 교회의 행정관이 되는 것이다”(위 헌장 20항). “성부께로부터 축성되어 세상에 파견되신 그리스도께서는(요한 10,36), 당신 사도들을 통하여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당신이 받으신 축성과 사명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이 주교들은 또 교회 안에서 여러 수하 사람들에게 여러 계층으로 자기 직무를 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제정된 교회의 직무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수행하게 된 것이다. 옛부터 이들을 주교, 사제, 부제들이라고 불러 왔다. 사제들은 비록 대사제직의 절정인 주교품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권한 행사에 있어서 주교에게 매어 있지만, 사제로서의 영예만은 주교와 함께 지니고 있으며, 신품성사의 힘으로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히브 5,1-10;7,24;9,11-28), 신약의 참 사제로서 복음을 전하고 신도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축성되는 것이다“(위 헌장 28항).

교회란 무엇인가?
회의 구성원을 그 신분에 따라 이렇게 규정하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의 가장 근본적인 관심사는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 따라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교회 생활의 구석구석, 교회 구성원 하나 하나의 정신 깊숙이 까지 그 가르침과 정신이 침투하게 하는 데에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멀리 남겨 두고 있습니다.

헌장의 가르침과 정신에 따라, 교회는 더 이상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평신도를 가장 밑바닥에 배치시킨 피라미드 모양이 아니라,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이 똑 같은 존엄성의 평면에 서서 이루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관념에 비하면 이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한 변화인 것입니다. 이제 누구나 같은 평면에 서게 된 교회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은 각기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에 따라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다만 그 안에서 질서를 존중하면 충분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사람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신앙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하다(1고린 12,12).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함에 있어서도 지체들이 서로 다르고 그 직무가 서로 다른 것이다. 같은 성령이 당신의 풍요하심과 직무상 필요에 따라 교회에 유익하도록 여러 가지 은혜를 나누어주신다(1고린 12,1-11). 이런 은혜 가운데서 사도들이 받은 은총이 가장 뛰어나는 것이니, 성령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사도들 권위에 복종시키셨기 때문이다(1고린 14)”(7항).

제 교회 안에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은 각기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선물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수행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교회 역사의 초창기부터 평신도의 역할이 대단히 컸고, 수도자 역시 본당에서 사제들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로서 특별한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해 왔습니다. 사제들이 평신도와 수도자들의 특별한 은사를 존중하여 제대로 꽃피게 하고, 평신도와 수도자 역시 사제들의 고유한 은사를 존중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빛과 힘을 받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올바로 수행한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참으로 밝을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사명은 무엇인가?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교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 자기의 처지에서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 그 사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백성은 구체적으로 이 사명을 현실 세계, 매일의 삶이라는 현장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회는 이 현실세계의 정황을 낱낱이 살펴가며 거기서 하느님 백성이 수행해야 할 일을 짚어주기 위해서 또 하나의 헌장을 반포하였습니다.

나.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모여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구원의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신도들의 단체는 사실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사목헌장 1항). 그리고 “오늘 인류는 그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이 시대는 심각하고도 신속한 변화가 점차로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대이다”(4항).


처럼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여 복음정신으로 바로 세워야 할 분야가 많지만, “특히 혼인과 가정, 문화, 경제, 사회, 정치생활, 민족간의 가족적 유대와 평화”(46항)는 가장 긴급하고 중요합니다. 신앙인들은 이 모든 분야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빛과 소금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무너져 가는 가치를 바로 세우고 건강하게 할 사명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다.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헌장>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앙인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분야 가운데 하나가 성서사도직 분야입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고,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 신앙생활의 참 맛을 느끼게 해 주는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성서운동은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서가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와 역할에 대해 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성서 안에서 당신 자녀들을 언제나 친절히 만나 주시고 그들과 말씀을 나누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 대해서는 지탱과 힘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마음의 양식, 영성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21항). 계시헌장은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을 빌어 성서가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절대적 중요성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25항).


라. 전례헌장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생활에서 가장 눈에 띠게 나타난 변화는 전례, 특히 성체성사 전례인 미사에서 드러납니다. 그 전에는 성당 구조부터 달라서 제대가 성당 정면 벽에 붙어 있고, 사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신자들을 등 뒤에 두고 미사를 봉헌했으며, 그 때 사용한 언어도 우리말이 아니라 라틴어였습니다. 이런 간단한 사실만을 기억해도, 전례헌장이 미사전례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례헌장이 도입한 변화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전례에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에 관해서 전례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비로운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제반 전례 의식을 <철저히 이해하는 가운데 능동적으로 완전히 참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런 식의 참여는 전례 그 자체의 본질이 요구하는 바이며, 또 ‘선택된 백성, 왕다운 사제,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2,4-5 참조)인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성사로 인하여 이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례개혁과 실천은 이와 같은 <회중 전체의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여라는 본연의 목표가 이루어지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14항).


리스도 신자들이 “이 신앙의 신비에 마치 구경꾼이나 방관자처럼 참여하지 않고, 예절과 기도를 통해서 이 신비를 잘 이해하고, 거룩한 행사에 의식적으로, 경건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48항 참조) 해야 한다는 전례헌장의 정신은 비교적 짧은 이 문헌 속에서 “신자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라는 말을 16번씩이나 반복하고있는 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2. 아시아 시노드(주교대의원회의)와 그 후속 문헌 <아시아 교회>

희년 준비의 또 다른 요인을 두고 <제삼천년기>에서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00년의 접근을 위한 준비의 일부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시작된 일련의 시노드들과 더불어, 대륙, 지역, 국가 그리고 교구의 시노드들입니다. 이들 모두의 바탕이 되는 주제는 복음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복음화입니다”(21항).

희년을 앞두고 지역별로 미래의 복음화 계획을 설정하기 위해서 대륙별 시노드를 열어야겠다는 교황님의 구상에 따라, 아시아 대륙의 시노드가 1998년 4월 18일부터 5월 14일까지 바티칸에서 열렸습니다. 각국 주교단을 대표하는 약 2백명의 주교들과 참관자들이 모여 아시아의 과거와 현실을 돌아보고 미래의 복음화 방향을 모색한 모임이었는데, 그 폐막식은 1999년 11월 6일 인도의 수도 뉴델리의 성심성당에서 있었고, 그 자리에서 아시아 시노드를 바탕으로 한 교황권고 <아시아 교회>가 반포되었습니다.


계 교회는 이제부터 한국 교회가 한반도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복음화 활동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 주교단은 1975년 <한국외방선교회>를 설립하여 지금은 상당수의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교구에서도 나름대로 세계 여러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만 해도 1984년 이후 페루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선교적 역량을 우선적으로 쏟아야 할 곳은 아무래도 지리 및 문화적 거리가 가까운 아시아 지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도 우리는 아시아 여러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아시아 시노드와 그 후속 문헌인 <아시아 교회>는 우리에게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아는 이미 세계 인류의 2/3를 포용하고 있고 어린이와 청소년층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그 비중이 더욱 커질 전망입니다. 또한 아시아는 세계적 대종교들이 거의 예외 없이 여기에서 발생했을 만큼 정신적으로 대단히 비옥한 땅입니다. <아시아 교회>는 맨 앞 부분에서 하느님이 인류 구원의 대 역사를 이 대륙에서 펼치기 시작하셨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파견하여 아시아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럼에도 불구하고 40억 아시아 인구 가운데 가톨릭 신자는 겨우 1억 2500만에 불과하고,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 5000만 명이 집중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전세계의 비그리스도인 가운데 85%가 이 아시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전세계 모든 대륙 가운데 가톨릭 인구 비율이 제일 작은 것입니다. <아시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시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흔히 그분을 이방인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교를 외래종교처럼 보는 역설적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토착화 작업을 통해서 아시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히 전례 분야에서 아시아 사람들의 감성에 자연스럽게 가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강조합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영적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데다가, 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채택되고 있는 이야기 형식의 표현 방식은 아시아 사람들의 감성에 대단히 잘 어울려 큰 호소력을 지니는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또 아시아 사람들은 “종교인들에게서 기도, 단식, 기타 여러 형태의 금욕적 수행을 높이 사고, 극기, 초탈, 겸손, 가난, 침묵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23항) 경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리 나라와 관련해서는 아시아에서 목숨바쳐 신앙을 증거한 위대한 순교자 몇 분 가운데 김대건 안드레아와 그 동료들을 중요하게 언급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위상을 교회 역사에서 확고한 위치에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극도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남한 교회의 지원을 격려하고, 하나의 민족, 언어,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남과 북이 서로 화해하는 데에도 교회가 적극적으로 공헌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시아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 비교해 볼 때, 한국 교회상황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여러 종교가 함께 있으면서도 종교들 간의 분쟁이나 알력이 별로 없이 비교적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 타 교파 및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리의 눈길을 교구 공동체 내부로 돌릴 때, “교회 안의 일치와 협력”에 관한 <아시아 교회>의 권고가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시노드 교부들은, 교구란 목자를 중심으로 성직자, 축성생활자, 평신도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들의 협력과 일치’ 라고 규정하고, 교회의 이 구성원들은 성령의 은총으로 힘을 받아 ‘삶과 마음의 대화’ 관계를 유지해야”(25항) 한다고 천명합니다.

3. 한국 주교단의 <대희년 길잡이>, 1-4권

교단에서는 대희년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성령께서는 또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간단하면서도 신앙인으로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요약한 길잡이를 발간하였습니다.


제 2 부
대희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

1. <제삼천년기>

런 노력과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제삼천년기>에서 밝히신 제안에 따라, 전세계 교회는 특히 마지막 몇 해 동안 직접적 준비를 위해 힘써왔습니다. 그래서 최근 3년간을 각각 그리스도의 해, 성령의 해, 아버지의 해로 설정하여, 향주삼덕 가운데 믿음(신덕)과 희망(망덕)과 사랑(애덕)을 차례로 묵상하고, 각각 세례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의 신비를 중심으로 이를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리고 이 대희년 본 해에는 전 세계 모든 신앙인들과 함께, 역시 교황님의 제안에 따라, <삼위일체> 의 신비를 중심으로 <일치>와 <성체성사>의 깊은 의미를 새기고 실천하는 데에 우리의 노력과 정성을 집중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약성서의 표현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의미 깊은 것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하직 인사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바오로 사도께서는 교회가 전례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던 이 표현을 써서 고린토 신자들에게 최상의 축복을 기원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전례 중의 전례인 성체성사 곧 미사에서 이 표현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분부에 따라 우리는 모두 삼위일체,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희년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의 토대요 기둥이며 완성인 이 삼위일체 신비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흐름
렇다면 삼위일체 신비가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초대교회의 표현에서 우리는 그 뜻깊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 아드님께서는 은총, 성령께서는 친교(혹은 일치)로 그 특성이 제일 잘 드러나신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은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고, 아드님께서 마련하신 은총은 성령을 통해서 사람들이 제대로 깨닫고 실제로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이보다 더 크고 확실하게 드러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 8,32).


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신 다음,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더 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 군인의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요한 19,34 참조)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 성심, 그분의 마음은 죄만 빼고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 되셔서 인간생활의 기쁨과 슬픔, 그 환희와 고통을 남김없이 체험하신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


마음의 수술
런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더 할 수 없는 사랑을 증명해 보여주는 이 십자가가 동시에 더 할 수 없는 시련의 기회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직전까지 예수님을 충실히 따랐던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만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갔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 시련이 얼마나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잘 알려 줍니다. 그 당시 제자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보기만 해도 몸서리나는 사형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아 제거된 한 인간의 종말을 말해줄 뿐, 그 언저리 어디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자들이 십자가에서 사랑을 찾아내려면, “세속적인 표준”(2고린 5,16)으로 보고 느끼는 습관에서 먼저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 라고 말할 수 있는 변화가 그들의 영혼, 마음 속 깊이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런데 이것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줄” 새로운 기준, 그들의 “마음에 새겨 줄”(예레 31,33) 새로운 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마음, 새로운 기운에 관해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 36,26-27).


새로운 기운을 가리켜서 신약성서는 “위에서 오는 힘”(루가 24,49) 혹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가 1,35)이라고 말합니다. 이 힘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충만히 받으신 이 “성령의 힘”(루가 4,14)으로 인류 구원의 위대한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자가 앞에서 달아난 다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던”(요한 20,19) 제자들 역시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서는 문을 박차고 나가 유다인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군중을 보고 큰 소리로”(사도 2, 2,14)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온갖 세속적인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과 그 참 뜻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성령의 힘으로 전혀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에 관해 사도행전은 두 가지 가장 대표적인 현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각기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언어를 쓰는 관계처럼, 의사소통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게 된 일입니다.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가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잡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사도2,1-8).


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변화의 두 번째 현상은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면서 물질까지 함께 나누게 된 사실입니다. 이에 관해서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44-47).


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났고, 성령을 통해 그것을 사람들이 속깊이 깨달았을 뿐 아니라, 몸 속에서 실제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은총>이나 성령의 <친교>는 실상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눈, 아들의 마음, 그리고 성령의 힘을 빌어서
위일체이신 하느님 각 위격의 위대한 업적을 체험한 인간은 “하느님은 사랑이심”(1요한 4,8.16.)을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과 인류 역사를 이끄시며 그 열쇠를 쥐고 계신 위대한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 깨달음과 동시에 사람들의 어깨에서 온갖 짐이 스르르 벗겨지고, 심지어 인간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절망과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분출시킴으로써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던 양심의 가책까지도 더 이상 그를 짓누르는 부담이 되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간은 몸으로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더 할 수 없는 사랑을 확신하고 체험한 사람들이 비로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경축하며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8-20).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의 눈으로 보고,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성령의 힘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리고 아버지, 아들, 성령, 이렇게 세 위격이면서도 한 분으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본 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이 모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일부터 시작하여 온갖 종류의 <공동체>를 통해서 여럿이 참된 하나를 이룰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실현하고 따라서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린토 전서 12장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교회를 이루는 사람이나 직책 혹은 은사가 여러 가지이고 많지만, 그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같은 성령께서 마련해 주시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12절). 이 말씀은 12장 전체를 요약하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은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잘 말해 줍니다.


지금 여기에서
런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힘이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활동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각종 성사,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성사인 성체성사가 그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으로 열매가 맺어지기 전, 130여 년 동안 전개된 전례 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이들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례는 원래의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이 자리에 다시 생생히 살아 계시게 하고 그분의 구원활동이 여기서 이루어지게 하는 신비적 활동이다”(오도 까셀).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힘은 아들에게 전달되었고, “위로부터 오는 힘”이신 성령께서는 빵을 아들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시어 성체성사라는 모양으로 그 힘은 결국 우리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위대한 힘이 응집되어 이루어주시는 사랑의 기적인 것입니다.


래서, 전례 일반, 특히 성체성사를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외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외 아드님께서는 아버지께 계속 자신을 봉헌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위대한 사랑의 행적들을 기억할 뿐 아니라, 그것을 지금 당장 나에게 뻗쳐오시는 아버지의 손길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살게 해 주시는
체성사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속박과 죽음의 땅을 벗어나 자유와 생명의 땅을 향해 걸어갈 때, 힘을 주어 그 나그네길을 계속하게 했던 <만나>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스라엘, 신약의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지상에서는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히브 11,13),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히브 11,16)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필립 3,14)


러므로 그 옛날 사막을 가로질러 이 땅에서 저 땅을 향해 걸었던 이스라엘에 비해, 땅에서 하늘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의 나그네길은 훨씬 더 멀고 높아서 인간적으로는 가 닿을 가망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만큼 “하늘의 시민”(필립 3,20)으로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데 필요한 힘, 그 원천인 빵도 그 옛날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탁월한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드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8-51).


렇기 때문에 전례, 특히 성체성사 전례에 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전례의식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행위이기 때문에, 가장 탁월하게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에 있어서 교회의 다른 어떤 행위도 같은 위치나 비중을 차지할 수 없다”(전례헌장 7항). 전례는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10항)이다. 특별히 성체성사의 전례(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절정”(교회헌장 11항)이다.


2. 새 인간, 새 세상 그리고 성체성사

계속되는 환멸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굴려온 민주주의의 바퀴가 조금은 앞으로 가게 되었어도, 노동자의 권리를 유보한 채 밀어붙인 경제제일주의 정책 끝에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어도, 정권이 바뀌고 국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던 사람들이 나라를 운영한다는 데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듯이, 썩고 냄새나고 혼란스럽고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이 가슴 후련하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런 현실을 두고 우리는 이를 어찌할 것인가?


모든 것들을 과거라는 강물에 영원히 흘러가 버리게 하고, 참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구악을 일소하고….” 무력으로 대권을 잡은 사람들마저 내 걸었던 이 꿈을 정말 현실 속에서 실현해 볼 방법은 없을까? 사람들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남을 진정으로 위해 주며, 한 몸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한 집에 같이 살면서도 깊은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하고 각자 제 일에만 몰두해서 실제로는 남남처럼 지내는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참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을까? 같은 아파트에 살며 아침저녁으로 눈길을 마주치면서도 표정하나 바꾸지 않는 마음의 담을 개운하게 헐어버리고 이웃 사촌의 본 모습을 회복할 방도는 없을까? 북한 주민을 진정한 동포로 끌어안고 그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하며 살 수는 없을까? 나아가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어디에서든지 재난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작게라도 고통을 함께 하는 마음을 전하는 일이 습관처럼 되게 할 수는 없을까? 한 마디로, 지연, 학연, 혈연 등 층층이 또 겹겹이 울타리를 쌓고 도랑을 파놓은 채 만들어 가는 “끼리끼리 문화”를 그만두고,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며 함께 사는 “사랑의 문화”를 건설할 수는 없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그런 생각은 참으로 좋지만 그것은 영원한 꿈일 뿐 세상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하다. 인간 세상은 어차피 그런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그래도 제일 잘 해결되고,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했다는 나라들을 보아라. 거기 사는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한가? 그런 사회가 문제도 제일 많고 마약, 알코올, 성, 도박 등 온갖 중독 현상에 빠져 파멸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가?’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에 머리를 끄떡이며 또 다시 슬며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다. 새로운 세상, 전혀 다른 세상은 가능하고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방법도 제시되었고, 그대로만 하면 지금도 그런 세상은 당장에 실현된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리고 그 방법이 처음으로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온 존재가 흔들리는 놀라움에 휩싸여 말했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 2,9)”.

렇습니다. 그 새로움, 전혀 뜻밖의 현실, 꿈속에서나 그리던, 아니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구악이 일소되는 정도가 아니고, 하늘과 땅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묵시 21,1). 이제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하느님과 맺었던 계약조차 그것은 “옛”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 계약이 들어서야 했습니다. 하느님조차도 “하나” 이시기만 한 것이 아니고 동시에 “셋” 이었습니다. 하나만으로는 십자가에서 처음 알게 된 하느님의 본질을 설명하고 이해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외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가 하느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아들도 하느님이시며, 십자가 앞에서 느끼신 인간적 공포와 나약성을 뛰어넘어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위로부터의 힘”을 불어 넣어주신 성령도 하느님이심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새로움에서 새 인류가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습니다”(골로 3,10)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 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기 등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 뱃속이 차있던 사람들이 새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신과 뱃속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등이 들어서고 자유의 흰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타고난 경향, 고장난 본성, 손댈 수 없이 날뛰는 육체의 욕정과 그 열매를 성령의 열매와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갈라 5,16-26) 바오로 사도는 이를 잘 그려 보여줍니다.

령은 이렇게 각 <개인>의 정신 속에 열매를 맺은 다음, 점점 밖으로 뻗쳐나가 <교회> 안에서 참된 일치와 형제다운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고, 마지막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짧은 눈으로 볼 때에는 선교이며, 긴 눈으로 볼 때에는 성령으로 정신이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을 가장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누룩 혁명>입니다. 그 과정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사도 2,43-47).

누룩혁명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규합하고 특히 노동자들의 힘을 모아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재화와 삶의 기회를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상을 가지고 출발한 공산주의는 실험이 시작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사람들을 꿈에 부풀게 하고 인간 세상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가장 적절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에 따라 착수한 혁명은 한 세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좋은 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처음부터 큰 잘못이 있었음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의 뿌리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며, 그것을 그대로 두고서는 참된 혁명과 진정한 새 세상 건설의 꿈이 환상일 뿐임을 인류는 깨달았습니다.

에 비해 겨자씨처럼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한 개인, 더구나 그 안에 숨어 있는 마음의 변화에서 출발하는 혁명이야말로 지상은 물론 천상의 나라에까지 뻗쳐 올라가는 거목으로 자랄 수 있음을 지난 2천년 교회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남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서가 아니라, 정 반대로 남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침으로써만 새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초대교회 이래 신앙인들은 체험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누룩 혁명의 출발점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으며, 그분의 당부에 따라 신앙인들은 세상 끝날까지 그 사건을 기억하며 거기서 시작된 혁명과업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나를 기억하여
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성체성사 곧 미사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앙생활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전의 세상을 부수고 허무는 대신 자기 자신을 부수고 허물었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재현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사회구조를 깨부수기보다 먼저 나 자신을 철저히 비판하고 거기 깃들여 있는 죄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재현합니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하는 말의 무게를 되풀이 기억하고 자신의 죄가 무엇으로 씻어지는지를 우리는 생각합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39) 하는 말씀대로,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어 맞이하는 죽음이 전혀 새로운 생명을 낳고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세상을 출현시킨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재현합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7) 하는 말씀에 따라, 형제다운 일치를 이루어냅니다. 그렇게 하여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라는 말씀대로 세상에 대해 가장 힘있는 증거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리는 참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단 하나의 길을 깨닫고 거기 필요한 힘을 얻어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전례가 아무리 중요하고 성체성사가 그리스도 신앙생활의 중심이라 해도, 거기에 머물고 말면, 그것은 마치 다볼산에 천막을 치고 언제까지나 거기 머물러있고 싶어했던 제자들의 심리 속으로 빠져드는 셈이 될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차례입니다”(1요한 3,16 참조) 하는 요한의 말씀을 실천할 <과제> 를 안고 세상에 파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3 부
우리의 과제

1999년 9월 7일부터 9일까지 나바위 교육관에서 교구사제 전체 모임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우리 교구 공동체가 힘을 모아 추진해야 할 일들에 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교구의 당면 과제를 다음과 같이 확정하여 알려드립니다.

가. 성서운동
<성서교실>을 중심으로 요 몇 년 동안 우리 교구에서는 성서사도직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왔습니다. 지금도 성서교실에 등록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며 점점 더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곳에 모여 교실에서 강의를 통해 성서를 익히는 방식에는 그 나름의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리가 너무 멀거나 강의가 있는 시간에 대어올 수가 없어서 마음은 있지만 성서공부를 할 수 없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게다가 성서는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도하고 읽고 배우고 자신의 삶에 비추어 하느님께서 깨우쳐 주신 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때, 성서의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삶 속으로 들어오고 성령께서 실제로 움직이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미 시작된 <성서백주간>을 모든 본당에 도입하여, 7-8명 단위의 작은 모임에서 성서를 공부하고 나누며 함께 기도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또, 녹음 테이프로 <성서 듣기>, <성서 통독>, <성서 필사> 등 구체적인 상황과 각자의 처지에 맞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는 운동을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학생과 일반 청년층을 위해서는 특별히 마련된 <청년성서>를 보급하는데 교구 공동체 전체의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함께 이념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대학 사회의 동아리들이 구심점을 잃고 젊은이들이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나라에서 대학생들과 일반 청년들 사이에 힘있게 파고들어 그들의 삶을 신앙의 빛으로 이끌어줄 마땅한 프로그램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던 중, 이 청년성서는 그런 우리의 기대를 흡족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시작한지 일년도 채 안되었는데, 도내 6개 대학교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여러 본당과 교구청에서 총 23개 반 158명이 매주에 모여 열심히 공부하고 진지하게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청년성서는 세포분열처럼 확산되어 나가기 때문에, 머지 않아 도내 16개 대학교와 본당 전체에 보급되어 대학생들과 일반 청년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신앙 체험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친구들의 소개로 청년성서를 알게 된 젊은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본당에서의 정규적인 신앙생활로부터는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본당에서는 그런 젊은이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교리교사 등 비슷한 연령층의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이를 적극 권장하며, 일년에 두 차례 함께 모여 갖게 되는 연수회비 가운데 상당 부분을 보조하는 등, 온갖 모양으로 젊은이들의 이 좋은 일을 격려하고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 냉담자에 대한 배려
1998년 말을 기준으로, 전국 380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 총수에서 전주교구 신자 14만 6천여 명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3.8%입니다. 주일미사 참여자의 전국 평균율은 30.7%이고 전주교구는 29.5%입니다. 냉담자는 전국평균이 29.9%, 전주교구가 31.6%입니다. 냉담자 전체 중에서 주소가 확인된 경우는, 전국평균이 43.6%, 전주교구가 60.6%입니다. 냉담자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펼쳐질 수 있는 준비가 비교적 잘 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조당, 교회 안에서 따뜻한 분위기를 만나지 못한 소외감 등 교회생활에서 거리를 두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혼인조당 중에 있는 분은 본당신부님을 통해서 교구 법원에 문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당이 해소될 수 있는 경우, 법원에서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조당을 풀어드릴 것입니다. 또 다른 사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중지하신 분들에게는 그 구체적인 사정을 감안하여 그분들이 다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인내와 사랑으로 도와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반 모임, 레지오 마리애 활동, 사제와 수도자의 가정방문, 전 신자의 기도와 속죄행위 등이 가장 큰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쉬고 계시는 교우들이 특히 대희년을 맞이하여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정성을 기울이도록 합시다.

다. 선교운동
국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교구에서도 역시, 최근 들어 조직적이고 잘 준비된 계획과 본당 신자들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모두 동원되는 선교 방식이 놀랄만한 효력을 내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선교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모든 본당에 소개하기 위해서 교구에서는 몇몇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교우들로 <선교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를 충분히 활용하여 모든 본당에서는 좀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선교 전략을 세워 교회의 이 본질적인 사명을 잘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고로, 선교와 관련된 우리 교구의 현 상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998년 한 해 동안 우리 나라에서 영세입교한 새 신자는 총162,679 명이었고, 우리 교구의 새 영세자는 6,197명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 새 영세자 총수에 비해 3.8%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우리 나라 신자 총수에서 우리 교구 신자 수가 차지하는 비율도 약 3.8%이기 때문에, 이는 우리 교구의 선교활동이 전국 평균과 정확히 일치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 신자 총수는 국민 전체에서 약 8.1% 였으며, 사제 1인당 평균 신자수는 1,349명이었고, 이에 비해 우리 교구는 200만 도민 전체 수에 비해서 신자 수는 7,26 %이었고, 사제 1인당 평균 신자 수는 982 명이었습니다.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이 전국 평균인 8.1%가 되려면 신자 총수가 16만 2천 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인구 대비 10%를 달성하려면 교구 내 신자 총수가 20만 명이 되어야 합니다.


리고 우리 교구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선교본당> 제도는 해가 갈수록 정착되어 많은 열매를 맺고 있으며 많은 신부님들이 이를 자원하시는 것은 선교의 미래를 위해서 참으로 큰 희망을 갖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 생명. 환경 운동
그만 물건 하나를 사도 격에 맞지 않게 크고 화려한 포장이 딸려 와 곧바로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고, 먹고 남은 음식이 또한 그렇게 되며, 썩지도 않는 비닐 제품들이 산과 하천에 쌓여 가는 등,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에 있어서까지 환경문제는 오늘날 시민생활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의 하나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고 난 다음 더렵혀진 세상에 살게 될 후손을 생각할 때나 창조주를 믿는 우리의 신앙을 생각할 때, 우리가 조그만 일에서부터 환경 정화와 물자 절약을 실천하면 그것은 사랑과 믿음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바구니 들고 다니기, 거리나 하천 청소하기, 분리수거 실천하기, 세제사용 자제하기 등 생활주변의 작은 일을 실천하면, 그것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산 교육이 될 것입니다.

마. 사회복지 운동
리 천주교회는 전국적으로 사회복지 시설을 많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교우들이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유달리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기울여 왔음을 나타낸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서도 동혜원, 상지원, 무지개가족, 작은자매의집, 영보은혜의집 등 상당한 연륜을 헤아리게 된 시설 이외에, 전주 근교의 성요셉동산, 성바오로복지병원, 전주 인보노인종합복지관, 전주시에서 위탁받은 사랑의 집(구 갱생원), 익산의 성모노인돌봄의집, 군산 근교의 성모양로원, 고창 야고바의 집 등, 최근 5년 이내에 새로 생긴 곳만 해도 상당 수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는 결코 볼 수 없으며 실직자 구직센터, 상설 무료급식소, 외국인 노동자들이 쉬고 상담할 수 있는 공간 등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분야는 너무나 많습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하나 하나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경제적 뒷받침을 요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할 수밖에 없으며, 대희년에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사랑의 대 바자회를 지역별로 개최하여 그 이익금을 사회복지 분야에 쓰기로 하였습니다.

바. 헌혈과 장기 및 시신 기증 운동
른 이들의 건강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피를 제공하고, 죽음에 임해서는 장기 및 시신을 기증하여 남의 목숨을 살리며 의학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은 참으로 큰사랑의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서는 지난 1998년 2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당신의 몸을 의학 연구를 위해 기증하신 김병엽 신부님의 모범을 계기로 하여, 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많은 신부님들과 교우들이 같은 뜻을 표명해 오셨습니다. 요즈음에는 백혈병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조혈모세포를 제공하여 꺼져 가는 생명을 구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 북한돕기, 통일 운동 그리고 인류 가족을 생각하기
민족이면서도 남북이 갈라져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과제는 민족의 화해와 국가의 통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심한 경제난 속에 살고 있는 북한 동포를 힘껏 돕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

교구사목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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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00년대 2007년도 사목교서 -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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